두 달 전쯤에 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동갑내기 사촌이 미국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최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조카와 함께 잠시 귀국하여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보았던 모습만 기억에 남아 있던 그 조카는 근육질의 거구가 되어 있었고 정말 늠름한 모습이어서 나도 모르게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우리말도 발음이 약간 어눌할 뿐 의사소통에 거의 지장이 없을 정도여서 더욱 대견했다. 올해 하반기에 부임 전 필요한 훈련을 받은 후, 내년 초 한국에 와서 의정부에 근무할 예정이라고 하여 고국을 근무지로 선택한 것이냐고 물었는데 그 대답이 영 의외여서 좀 놀랐다. 조카의 대답은 한국이 고국이라서가 아니라 가장 위험하고 고된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에 가길 원했는데 아프간, 중동 등 교전이 있던 지역은 더 이상 미군이 작전을 수행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로서 미군 내에서 가장 위험하고 훈련이 고된 곳으로 분류되어 있는 한국으로 근무지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웨스트포인트의 다른 생도들도 같은 생각이냐고 물었더니 그 대답은 이랬다. “대부분은 같은 생각이며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면 웨스트포인트를 다닐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그는 한국이 아니라 미국을 위해 애국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약간은 좀 섭섭하기도 했는데 한편으로는 미국 시민이니까 그러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너무나 확신에 차고 늠름한 그의 모습에 그의 생각이 어떤지 좀 더 알아보고 싶어 국가관과 가치관, 리더십 등에 대해 질문도 하고 조언도 하면서 많은 대화를 했다. 그리고는 몇 가지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그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단지 미국 시민권자로서 미국이 자신의 조국이기 때문에 국가에 충성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미국이 지향하는 가치, 즉 자유, 평등, 박애 등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러한 가치를 지향하는 미국에 자연스럽게 충성심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미국은 전 세계에 그러한 가치가 실현되기 위해 행동해야 하며 자신들이 그 역할의 일부를 담당한다고 믿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어떤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자랑스러운 가치를 수호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는 기업 경영에서 조직 구성원이 조직의 비전과 핵심 가치를 공유하고 신념을 가질 때 조직 구성원의 내적 동기부여가 극대화되며 위대한 기업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충(忠)’이라는 한자의 의미가 ‘마음의 중심’이라는 뜻이며 절대로 어떤 집단이나 특정 개인에게 복종함을 의미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영화 ‘명량’에서 보듯 이순신 장군이 ‘忠은 임금이 아니고 백성을 향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사회의 리더들은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조직을 위해, 자신을 위해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충성심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구성원이 그 조직과 집단을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왜 그래야 하는지가 명확해야 한다. 그냥 너는 집단의 일원이기 때문에, 혹은 내가 너를 고용해 주고 돌보아 주고 있으니까 라는 것으로는, 강요는 할 수 있으나 자발성을 끌어낼 수 없다. 그 집단이 국가라면 어느 정도는 강요가 가능할 수도 있다. 국가는 인종, 언어와 함께 엮이기 때문에 그 집단이 싫어 떠나는 것은 너무나 많은 비용을 초래하기 때문에 강요를 당했을 때 대부분은 복종한다. 하지만 기업은 그 기업을 떠나면 그만이다. 그리고 떠날 준비가 되기 전까지 말 잘 듣고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보이면 그만이다. 국가의 리더, 조직의 리더, 군대의 리더들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고 요구하기 전에 그들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켜야 할 공유 가치가 무엇인지를 제시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집단은 시한부로 머무르는 곳이 된다. 떠날 준비를 하며 조직에 머무르거나 군대에 가서 무조건적으로 국가에 대한 복종과 적에 대한 적개심을 강요당하는 것 모두 시한이 있는 게임이다. 그래서 그 시간만 버티면 된다는 소극적인 생각으로 임하게 되니 ‘충’이 나올 수가 없다. 우리 군대가 요즘 보여주는 슬픈 자화상들은 이런 것들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그 조카에게 놀란 또 하나는 ‘리더십’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내가 리더십에 대한 조언을 몇 가지 해 주었는데, 그는 그 조언들이 자신들이 웨스트포인트에서 배운 것들과 정확하게 일치하며 자신들은 모두 그것이 몸에 밸 정도로 훈련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음식은 부하들을 먼저 먹게 하고 모자라면 우리가 굶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앉을 자리가 나면 병사들을 앉히며 장교들은 맨 마지막에 앉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 병사들이 전투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나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감동받았다. 그 이상 리더십에 대해 무엇이 더 필요한가? 이 땅의 모든 리더들은 내 조카, 이 젊은 친구의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 나는 진작에 작금의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들은 정치, 경제, 군대 할 것 없이 ‘진정한 리더십의 실종’이라는 진단을 내린 바 있다.
나는 그 조카에게 한국어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하라고 조언하면서 미래의 비전을 하나 제시했다. ”너는 웨스트포인트에서 리더십의 진수를 배운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철저히 실천해서 완전히 너의 것으로 만들어라. 그리고 언젠가 한국에 돌아와 너의 또래의 젊은이들을 도와 주어라. 너와 비슷한 나이의 한국 젊은이들은 불행히도 너와 같은 교육을 받지 못한다. 더욱 슬픈 것은 그들이 닮고 싶고, 따라 하고 싶고, 보고 배우고 싶은 기성세대의 리더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언젠가 네가 배우고 경험한 리더십을 그들과 공유하고 전파하는 일을 해 다오.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너에게 분명히 보람된 사명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네가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해라. 그래야만 지식과 경험을 전달하는 소통에서 더 나아가 공감의 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리더십을 배우고 그렇게 행동하는 리더들을 경험할 수 있는 그 사회가 좀 부럽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리 모두가 만들어 가야 할 방향일 것이다.
글 .김용진 사장 『디와이』